정병국 작 ‘Tattoo in Scarlet’
정병국 ‘Roses’
작품만 보고 후다닥 갤러리를 나설 참이었다. 하지만 인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작가와의 만남은 좋다. 하지만 피하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벌거벗은 심정이다. 미술에 대한 식견이 짧은 터라 작가와의 만남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 이후 작성해야 할 전시 소개 기사가 힘에 부치기도 한 까닭이다.
이날도 우연히 작가와 전시장에서 만나게 됐다. 갤러리분도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푸른 회화로 한국미술계에 강력한 인상을 남겨온 정병국(전 영남대 회화과 교수) 작가다. 짧게 인사나 나누겠지 싶었는데, 그와의 대화(아니 그의 ‘특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는 훌쩍 1시간가량 이어졌다.
얼굴에 주름이 깊은 70대의 작가는 청년 같았다. “내가 먹고 살라고 ‘나이 든’ 학생들을 가르쳤어”라고 말하는 그에게 매료된 ‘특강’이었다.
그는 이번 전시에 대해 “내 그림을 나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번에 내가 보고 싶어서 하는 전시”라면서 “작업실에 쌓여 있어 안 본 지가 너무 오래된 작품들이다. 사람처럼 목소리가 있었으면 한탄했을 것 같다. 이럴 거면 왜 날 낳았냐고”라고 말문을 열었다.
정병국의 ‘이미지, 글씨’展이 갤러리분도 2·3층에서 열리고 있다. 2012년 갤러리분도와 봉산문화회관 두 공간에서 대규모 프로젝트 ‘몸’ 전시를 한 이후 10년 만에 갤러리분도에서 작가의 다양한 작업 세계 중 미처 발표하지 못한 11점을 선별해 끄집어낸다.
전시는 이미지와 글씨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머릿속에 있는 인물과 사물, 또는 배경에 대한 이미지를 캔버스에 담고 글씨를 더한다. 이미지와 글씨가 만나 화면에 둘의 관계를 맺어줌으로써 새로운 회화를 보여준다.
정병국의 ‘이미지, 글씨’ 전시 모습. <갤러리분도 제공>
정병국 ‘立春大吉’
전시장에서는 두 개의 화폭을 붙인 5m의 대작 ‘Black, Red’를 만나볼 수 있다. 흑백으로 담담하게 정지돼 있는 여인의 모습과 빨간색으로 쓰인 역동적 서체의 아름다움이 대비적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와 함께 △동료 교수였던 중년 남성의 비장한 모습의 이미지와 왼편에 공판화 기법으로 새겨진 ‘DREAM 1987 JUNG’ 글씨가 합쳐져 많은 서사를 담고 있는 ‘DREAM’ △중성적 이미지의 인물과 단단한 해서체로 쓰인 ‘立春大吉(입춘대길)’ 글씨가 관계를 맺고 있는 ‘立春大吉’ 작품이 전시돼 있다. 축구공, 바나나, 장미 등의 이미지와 글씨가 어우러진 작품도 걸려 있다.
이미지와 글씨의 조합은 낯설다. 작가의 작업에서 이미지와 글씨, 이 둘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다. 글씨는 이미지와 상관없이 조형성을 생각해 화면에 채웠을 뿐이다.
작가는 “우리는 자주 보지 못한 것을 낯설다고 생각한다. 어울린다는 것은 습관”이라면서 “낯선 것과 만나야지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뜸 “우리나라의 비극이 뭔 줄 압니까”라고 묻고는 이내 대답한다.
“끼리끼리입니다. 조금만 다르면 인간 취급을 안 해요. 물론 다르다는 것은 여러가지 요소가 있겠죠. 하지만 이질감이나 적대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에게는 절망밖에 없습니다.”
그는 또 “모든 물건들은 그 기능을 상실했을 때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글씨도 그 기능을 상실했을 때 색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면서 “이 세상에 무엇이든 함께 놓으면 가까워지려고 하는 자력이 있다. 무인도에 두 사람만 있으면 서로 얘기를 안 하겠냐. 앞으로의 모든 발상은 ‘그것도 가능할 수 있다’라는 방향으로 자꾸 생각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의 작품이 더 묵직하게,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는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을 꺼리지 말고 친숙하게 하고, 새롭게 발상을 바꾸려 하며, 그럼으로써 보다 성장하라는 각성의 메시지와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전시는 30일까지.
영남일보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