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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Jochum

2018. 7월 2일 - 2018. 7월 21일

뉴욕에서 활동 중인 현대미술가 리처드 요쿰(Richard Jocum)의 개인전 <백 앤 포스 Back and Forth>가 갤러리 분도에서 7월에 벌어진다. 리처드 요쿰은 설치 작업과 사진과 아카이브 및 미디어 작업 등 콘텐포러리 아트의 범위가 허용하는 각 장르의 전위에서 활동하는 작가이다. 그가 제시하는 작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문제, 현대 예술의 유용성/무용성 논쟁, 미술 교육의 현실, 그리고 예술의 사회적 공공성에 관한 방안 등 심도있고 다양한 주제를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밑바탕에는 그가 가진 철학적 인식이 숨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악지역에서 태어난 리처드 요쿰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인문학과 미술을 함께 공부했다. 이것은 유럽의 학제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와 철학자의 길을 병행해 온 그는 현재 미국 콜럼비아 대학 철학과의 교수이자 미국과 유럽에서 전시 활동을 펼치는 이력으로 드러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는 우리나라에서 한동안 열풍처럼 다가온 학문과 예술의 융합의 전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세계를 내적으로 인식하고 외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철학적 지식을 일반대중과 철학도 그리고 미술애호가들에게 효율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예술 창작과 전시를 매개로 선택한 것이다.      

이번 개인전은 작가가 최근에 완성하고 처음 발표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꾸며진다. 전시 제목인 Back and Forth는 우리말로 ‘왔다갔다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 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상황에서는 ‘서로’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는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 이리저리 끼워 맞춰진 의미를 시작적인 조형으로 드러낸다. 예컨대 십자말맞추기(Crossword) 프로젝트나 관객에게 설문조사 카드를 주고받는 프로젝트도 그러한 의미에 닿아있다. 이번 전시는 갤러 분도에서 벌어진 2010년 개인전에 이어 8년 만에 이루어지는 기획이다. 당시에 현대미술의 자아성찰 3부작 <어! 이것 장난 아닌데? Wow! This Is Not A Joke, It’s Art?>에서 장준석, 정용국 두 한국 미술가와 릴레이전 형식의 개인전을 벌이며 한국에 자신의 작품을 처음 공개한 리처드 요쿰은 이전 전시와 현재 전시의 형식을 일치하여 구성했다. 그는 다만 그동안 진전된 주제 의식-예술과 사회적 편의 혹은 공공성의 양립 가능성-을 좀 더 날카롭게, 그리고 미적으로 수려하며 동시에 유머를 잃지 않는 자세를 취한 채 다시 한 번의 자신의 시각적 철학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Criticism

Back and Forth

막 지나온 한 시대를 주름잡던 복서 타이슨이 실재로 이런 말을 했는지, 난 잘 모른다. 아무튼 그가 남겼다는 명언이라며 떠도는 말을 다 들어봤을 거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지, 얻어맞기 전까지는.” 링에 오르는 그 권투선수들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진 사람들이 또 있으니, 그들은 개념미술가들이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 우리 앞에 작업을 펼친 리처드 요쿰(Richard Jochum)도 생짜배기 시절엔 숱하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그에게 주먹을 날린 강자는 다름 아닌 냉랭한 평론가들과 학예연구사들, 실속을 따지는 갤러리스트들이며, 링 밖에서 이를 지켜본 자들은 미처 지적인 태도를 덜 기른 대중과 학생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우러러 보는 개념미술가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하도 맞다 보니까 어느 순간 맷집이 생기고 주먹을 피할 수 있는 감각도 생겼다. 이번에 무대를 옮겨 <백 앤 포스 Back and Forth>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벌이는 매치에서 그는 링 위의 승자로 남을 건지, 아니면 패배를 할 건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가 밟는 스텝은 굉장히 경쾌하다.

흥미롭게도, <Back and Forth>는 갤러리 분도의 공간 안에서 일종의 재귀적인 체계로 완성되었다. 작가도 읽어봤을 거다. 더글러스 호프스테더(Douglas R. Hofstadter)가 쓴 <괴델, 에셔, 바흐 Gődel, Escher, Bach: an Eternal Braid>에 묘사된 무한 반복성과 상호보충성 그리고 자기준거성을 요쿰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잠깐 사례를 읊는다면, 이것들은 예전 작업을 살짝 뒤틀어 다시 재현한 시도, 내용은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인데 매체 형식을 다양하게 펼친 실험, 전혀 달라 보이는 작품 개념이 이어진 기획 같은 예이다. 글로 써놓으니까 어려워 보이는데, 안 그렇다. 그의 작업은 지루하지 않고, 굉장히 재미있다. 잘난 체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학적인 태도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관찰하는 유럽과 미국의 여러 사람들인데, 서구인들도 우리 이론가들처럼 사람이 재미없기는 매 한 가지 같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평가할 입장은 못 되는 걸 그들도 알고, 작가도 알 거다. 리처드 요쿰은 8년 전에 이곳에서 현대미술의 자아성찰 3부작 <어! 이것 장난 아닌데? Wow! This Is Not A Joke, It’s Art?>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그러니까 방금 내가 이야기 꺼낸 재귀적 체계로서의 전시 또한 기본적으로는 2010년 <Wow! This Is Not A Joke, It’s Art?>와 2018년 <Back and Forth> 둘 간의 관계며, 그 가운데 끼인 이력과 전환점과 발전에 관해서는 내가 직접 볼 수 없었다. 안 봤는데 어떻게 아는 척 쓰나? 내겐 여러 평론가나 학예연구사가 가진 전지적 시점이 없다. 그래서 말인데, 두 개의 전시를 양쪽에 놓고 비교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억지 논리는 세워본다.). 20세기 초 명왕성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게 지구로부터 멀고, 공전주기가 긴 탓에 그냥 멀리 있는 별인지 태양계 행성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이때 쓴 방법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대상의 위치를 관찰한 시계열 분석이다. 자, 리처드 요쿰이 한국에 이름을 알린 지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바뀐 건 무엇이며, 그는 무엇을 꾸준히 지켜왔을까? 전시 표제인 ‘Back and Forth’는 우리말로 ‘왔다갔다하는’이란 뜻을 가졌다. 요쿰은 전시와 준비 작업을 동기로 삼아 여러 곳을 왔다갔다했다. 작가의 실천이 곧 제목이다. 작가 마음이 그러하니까 나도 그의 생각을 따라 가본다.

갤러리 분도의 동쪽 입구에 들어서면 우리 눈에 먼저 들어오는 작품은 바닥에 놓인 커다란 사탕일 것 같다. 일종의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데, 작품명이 벌써 밝혀놓았다. 은색과 파란색으로 반짝이는 락 캔디(Rock Candy)가 그것이다. 껍데기 속에 든 알맹이는 사탕이 아니라 돌이다. 크기로 따져볼 땐 스톤 캔디가 더 적당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락 캔디인 이유는 그만큼 크기의 압도적인 부풀림 때문이다. 사탕 포장지가 예쁜 것은 전적으로 사탕의 새콤달콤함을 눈으로 미리 체험하게끔 하는 기호일 건데, 요쿰 표 사탕은 먹을 수 없는 가짜다. 그렇다면 사기가 아니냐고? 맞다. 예술이 계획된 사기이지 않나? 감각적인 층위의 가장 겉을 벗기면 아름답지도 달콤하지도 않다는 예술에 대한 풍자가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은 선물 포장지를 사진으로 출력해서 그럴 듯 뵈는 유사(quasi) 추상평면작업으로 버젓이 내어놓은 <페이퍼 Paper>연작이 진화된 형태다.

바로 뒷 벽면을 채운 작품 서베이(Survey)도 시야에 꽉 차게 들어온다.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다/아직 더 악화될 수 있다/다 잘 됐어. 뭐가 문제야’라는 한글 문구가 흑백의 대비 가운데 적혀있다. 설명이 없다면 참 뜬금없다. 뭔가 하면, 이런 걸 가정해보자. 선거를 통해서 누가 당선되고 누가 낙선을 했다면, 이에 대한 우리 반응은 각자 엇갈릴 거다. 세 가지 항목 가운데 한 가지 반응을 찍으면 된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벽면 디자인과 똑같은 모양으로 된 우편엽서를 준비해 놓았다. 관람자는 엽서를 갖고 가서 몇 가지를 채워서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요쿰이 신경 쓴 건 벽화와 같이 세 항목 가운데 택일하는 앞면만큼 뒷면에 적힌 주관식 물음이다. 일단 이 메시지의 발화자인 작가 본인에게 물음을 던진다면 객관식 문항은 2번을 택했을 것이고, 주관식 문항에는 선거 제도가 갖는 맹점 혹은 독재에 침해받는 예술의 자율성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 같다. 다시 말해,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오스트리아와 그가 현재 살고 있는 미국, 두 나라의 정치 상황은 극우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은 공통점이 있는데, 이게 다 선거 득표수로 한 쪽이 나머지 다양한 목소리를 잠재워버리는 대의민주주의에 관한 의문으로 해석된다. 정치가 그렇다면, 이는 예컨대 과학에서 예컨대 사회과학에서 양적인 연구방법과 질적인 연구방법 사이의 대립, 나아가 실증주의와 해석학 간의 논쟁을 떠올리게끔 한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정답을 강요하지는 않고, 그 자신도 감상적인 프로파간다로 빠지지도 않는다. 그건 그렇고, 내가 작가라면 더 생생한 말투를 썼을 것이다. 이를테면 “완전 엿 됐어/이건 시작에 불과한 듯/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으로.

애쉬 투 애쉬, 스톤스 투 스톤스(Ashes to Ashes, Stones to Stones)는 화면 속 여자 주인공이 물속으로 돌을 계속 집어던지는 퍼포먼스를 카메라에 담은 작품이다. 이 또한 신화 속 캐릭터인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결과를 알 수 없이 허튼 행위를 반복하는 개념예술가의 정체성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또 그 돌은 자연스럽게 <록 캔디>를 떠올리기도 한다. 제목이 뭘 말하는가 하면, 영국에서 장례식 때 낭독되는 진혼싯구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Ashes to ashes, dust to dust”를 살짝 비튼 텍스트인 것 같다. 난 이 말을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노래로 처음 접한 탓에 그 허무한 인생관을 잘 공감할 수 있었다. 예컨대 위기에 빠진 연인들이 결국 남으로 돌아서는 과정조차도 예술은 아름다움으로 묘사할 수 있지 않나. 일단 요쿰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감정의 굴곡은 수면에 서서히 퍼지는 파문으로 남는다.

밴드에이드(Bandaid)는 말 그대로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오브제와 인물사진 연작이다.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작가가 방한한 최근에야 들을 수 있었다. 아침에 그가 묵은 호텔로 가서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들었던 사연인즉슨, 이 작품은 10년 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시작되었으며, 그동안 그가 입은 여러 상처를 덮는 일종의 치유 방식인 셈이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같지 않나. 비슷한 일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 나는 운전대 앞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가눌 수 없었다. 좀 다르게 연결하자면, <록 캔디>의 사탕 포장재도 원래 야외에서 다친 사람을 감싸는 응급 담요 내지 커다란 반창고다. 그가 보듬고자 하는 상처는 본인과 연인 혹은 이웃, 더 나아가 사회 공동체로 대상을 넓혀간다. 공 모양으로 된 반창고 더미가 보여주는 건 결국 지정학적인 부조리와 위기에 빠진 우리 인류 전체를 향한 위로다.

아틀라스(Atlas)는 예전 전시에서 소개되었던 작업의 최신판이다. 이건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로부터 어깨와 팔로 땅을 받히는 벌을 영원히 받는 아틀라스가 그 주제다. 물구나무서기 한 작가를 찍은 필름을 180도 거꾸로 세우면 그가 지구를 들고있는 모양새가 된다. 좀 억지스러운가? 작가는 그의 미적 세계 속에 여러 인물들을 배우처럼 쓰는데, 자신조차도 하나의 캐릭터로 인격화하여 등장시키길 즐겨왔다. 예전 작업은 작가의 고향인 알프스 산맥에서 촬영했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그리스다. 몹시 힘들어하는 그의 표정과 몸짓이 인상적이다. 본인의 해명으로는 파르테논 신전 부근에 바람이 드세다는데,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신은 10년 전보다 나이를 먹은 게 확실하다.

그리고 문제작, 크로스워드 프로젝트(Crossword Project). 문제가 딴 게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내가 작품이 실현된 것을 못 본 가운데 써야하는 입장 때문이다. 낱말 맞추기는 먼저 제시되거나 맞힌 단어가 실마리가 되어서 남은 빈칸을 메워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퍼즐의 물음에는 그와 같은 길잡이가 없다. 다름 아니라 영상 사진 작업에 대한 내 상황과 같으므로, 더 이상 어설픈 설명 없이 통과! 이 부분은 언제라도 보충되거나 수정할 수 있으므로 또 달리 쓰일 수 있는 문단이 이 지점이다. 하긴, 작가가 자기 예술을 통째로 아는 듯 이야기를 늘어놓는 평론가보다 나처럼 겸손한 관찰자가 있다는 게 크게 불쾌하진 않을 것 같기도 한데, 글쎄.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뭣보다 그 나라의 글자를 보고 하나의 기호로 받아들인 인상을 책으로 엮은 게 <기호의 제국> 아닌가. 리처드 요쿰의 눈에 처음 들어 온 한글 또한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앞선 <서베이>도 그랬고, 이 작품에 배열된 한글이 내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곧장 인지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한 나라 말을 다른 언어로 바꿀 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틈은 예컨대 언어학적 화용론에서 다룰 법한 주제다. 만약 작가가 이런 점까지도 본인이 강조한 사회적인 이매지네이션(Social Imagination)의 한 요소로 채택했다면, 그는 천재가 분명하다. 아니라면 그 점을 잡아낸 내가 대단하단 건데, 꼭 그렇진 않고 그냥 뒤끝 있는 참견꾼 정도라고 해두자.

갤러리의 구석에 투 채널 식인 것 마냥 설치한 캐치(Catch)는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한 요쿰은 웃고 있다. 보는 나도 한 순간 행복해진다.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된 이 작품은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두 사람이 핸드폰으로 서로를 찍은 동영상을 동기화해서 붙인 영상이다. 두 개의 화면은 매혹적인 대위법을 이루면서 그들 삶과 예술의 한 부분을 기록했다. 로우 테크놀로지로 뽑아낸 최상의 미디어 아트라면 이건 과한 레토릭일까?

마지막으로, 턱 오브 워(Tug of War) 실로 이 작품은 제작에 쏟은 시간과 비용과 노력에 훨씬 미치지 못했겠지만, 한국에서 실현되는 과정 또한 굉장한 수고가 들어간 줄다리기였다. 여러 대의 모니터가 재현하는 상황은 영화학에서 다뤄지는 이른바 180도 법칙, 즉 가상의 시선을 180도 안에 있는 배경만 촬영하는 원칙을 지키지만, 그 결과물을 생략할 건 모니터들 밖으로 추려내어 버리고 남은 핵심을 둥글게 세웠다. 관객들을 그 가운데로 불러들인다. 이는 영화에 의해 위축된 미술이 시대에 저항하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힘이야말로 리처드 요쿰이 품은 시각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공간 속에 실현시킨 원천이다.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



EXHIBITION INFO
  • Artist :리처드 요쿰 Richard Jocum
  • Date : 2018. 7월 2일 - 2018. 7월 21일
  • Location :GalleryBu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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