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칠作 ‘그림연습’
31일까지 대구 갤러리 분도
서양화가 이진용展 리뷰
펭귄북 1만5천권 모은 대단한 수집광
오래된 책·문구류 등 그림으로 남겨
“대상 보지 않고 그려…사실화 아냐”
서양화가 이진용은 대단한 수집광이다. 그는 전시나 여행을 목적으로 떠난 낯선 도시마다 빈티지 숍을 사전 조사하고 수소문해서 찾아다닌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물건을 구입한다. 오래된 책에서부터 시계와 완구, 차와 다기류, 가방이나 문구류, 화석과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양은 엄청나다. 그렇게 수집한 것들을 그는 작품으로 끌어들인다.
이번엔 ‘펭귄 출판사’가 펴낸 옛날 책이다. 작품은 오래된 책들이 마치 그대로 꽂혀있는 듯, 사실적이다. 빛이 바래고 찢어지고 얼룩진 책은 시간이 남긴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탁월한 재현술에 기반을 둔 무척 잘 그린, 진짜 같은 그림이다. 그 오래된 책을 빌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힘, 그에 따라 변화하며 서서히 소멸해가는 존재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11월9일까지 갤러리 분도에서 열리는 ‘메타 콜렉션’은 2012년 ‘쓸모 있는 과거’, 2015년 ‘5015. 158. 43’에 이은 대구에서의 세번째 개인전이다. 작년 후반기부터 새로운 구상으로 시작한 펭귄 출판사가 펴낸 책을 그린 작업이 공개됐다.
누렇게 변색되고 표지가 너덜거리고 얼룩지고 손때 묻은 펭귄북을 그는 1만5천여권이나 사 모았다. 오래된 것은 출간연도가 무려 193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되고 낡은 수집품들이 견뎌온 세월에서 무한한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는 그는 “오래된 사물은 유한한 인간에게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존재다. 오랜 세월 동안 엄청난 사물들을 수집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고 했다.
알록달록한 펭귄북이 빼곡히 꽂혀있는 그림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는 작품이 극사실적인 그림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극사실주의도 사실주의도 아니다. 나는 대상을 보고 그리지 않는다. 내가 책을 그릴 때 그 책은 내 머릿속에서 나온다. 내가 무수히 많은 오래된 책에 축적된 시간을 보면서 받았던 감동이 머릿속에서 재구성되어 그림으로 표현된다. 그런 면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작품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그가 그린 그림은 이처럼 모두 그가 수집한 물건에서 출발한다. 수집한 물건의 외형을 그대로 모방 재현하기보다는 그 물건들이 견뎌온 오랜 시간에서 받은 감동과 에너지를 그림으로 표출하는 것이 작업의 목적이다. 과거로 회귀할수록 미래의 예술로 나아가는 이진용만의 독특한 작업세계다. “사물의 본질적인 무엇, 보편적이고 영원불변한 무엇, 그리고 객관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이번 개인전에는 레진 연작도 함께 공개된다. 레진 연작은 올 상반기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반복과 차이’전에 출품되었던 작품들과 이후 새로 완성한 작품 가운데 선별된 것들이다. 자신이 수집한 물건들을 화면에 넣고 레진을 부어 그대로 굳힌 작품들은 흡사 곤충이 갇혀있는 보석 호박을 연상케 한다. 거울, 시계, 안경, 열쇠 등을 레진 속에 가둔 작품은 ‘작가의 보물상자’다. 그는 이를 ‘기억의 컬렉션’이라 명명한다. 모든 사물은 그 시간의 힘에 의해 사로잡혀 있는 것들이고, 죽어가는 것들이라는 것을 레진 속의 ‘물건’들은 말하고 있다.
영남일보 이은경기자